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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의 무의식에 관련된 내용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 내면의 무의식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내면의 무의식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끝까지 읽어주세요. 이제 아래에서 모두 알려드리겠습니다.

    내면의 무의식

    초창기 심리학이 인간의 행동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였다면 이후로 심리학은 점차 내적 요인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외적인 행동 경향 중심에서 내적 동기로 심리학의 흐름이 전환되는 데 가장 직접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1856~1939)입니다.

      프로이트는 내면의 무의식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근원적 동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신경생리학을 전공하고 수련의로 일하면서 생리학적 원인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신체의 이상 반응들을 임상 현장에서 목도하게 됩니다. 목에 아무런 구조적 이상이 없는데 물을 삼키지 못한다든지, 손목의 신경기능에 아무런 손상이 없는데 팔을 못 쓴다든지, 환자들이 신경과 무관하게 실제 고통을 겪는 상황을 목격한 프로이트는 당시 최면을 통해 이런 신체적 이상 증상을 치료하는 것으로 명망이 높았던 의사 샤르코 Jean Martin Charcot(1825~1893)를 찾아갑니다.

      샤르코가 치료하는 환자들은 주로 귀부인들이었는데 프로이트는 눈앞에서 귀부인들이 샤르코의 최면암시에 빠져들어 자기 내면의 기억을 꺼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그들이 호소하던 신체의 증상이 호전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의식 안쪽에 가려진 또 한 층의 마음, 즉 ‘무의식’이 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무의식은 의식이 깨어서 기능할 때는 나타나지 않도록 억압되기 때문에 일상에서 개인은 자신이 숨긴 무의식이 원하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프로이트의 통찰에 의하면 의식에서는 불결하고 천박해서 멀리하던 것을 무의식에서는 간절히 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식과 무의식의 괴리감이 클수록 더욱 완고하게 의식은 그 내면의 욕구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는데, 문제는 그게 끝까지 억눌려 감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체에 두통, 복통, 현기증, 마비 등의 ‘증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프로이트는 신체의 작용에는 자신도 모르는 내면적 추동이 관여하며 그 추동은 우리가 의식에서 금지한 것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확신했던 무의식에 대한 가설로,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내부에서 금기와 규칙을 명령하는 ‘초자아’와 그런 금기에서 벗어나 위반을 꿈꾸는 욕구의 공간 ‘이드’와 이런 금기와 본능 사이에서 의식적으로 절충하는 ‘자아’로 이루어져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증상으로 나타나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작용을 분석하고 증상을 마주하여 스스로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주된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무의식을 분석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였던 ‘최면’에 대해 프로이트는 회의를 품게 됩니다. 최면 자체가 환자가 아닌 의사에게 더 주도권이 있었기에 의사의 질문에 의해 환자의 내면에 억눌린 것이 언어로 ‘발산’되고 나면 증상은 즉각 호전되는 듯했지만 일시적일 뿐 다시 재발된다는 것에서 최면은 의사를 대상화하여 의사에 대한 의존성을 더 부각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면을 중단하고 프로이트는 환자가 당시 상황에서 자유롭게 떠오르는 대로 대화를 이어가는 ‘대화 치료’를 시도했습니다. 바로 이 대화 치료의 장면이 현대까지 이어지는 정신분석 상담실의 모습입니다. 분석가는 환자의 뒤에서 환자가 떠올리는 자유로운 이야기를 듣고 환자는 편안한 카우치에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이런 장면은 환자들의 의존성을 부각하지 않고자 하는 프로이트의 의식하에 마련된 전통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프로이트가 살던 시대에 이런 증상의 문제들을 호소하는 귀부인들이 많았던 것일까? 
    프로이트가 살던 시대는 봉건적 사회구조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이 급속하게 삶에 확산되던 격변의 과도기로 의학계에는 세균, 세포와 신경계, 뇌의 구조와 역할에 이르는 폭발적인 지식의 발전이 있었고, 산업화의 발달로 사회구조 전반이 새로운 변화의 국면에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기존의 전통적 가치관과 새로운 문명화에서 요구하는 가치관 사이에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 가장 사각지대에 있던 부류가 소위 상류층 여성이었습니다. 세상은 새롭고 다양한 욕망들로 가득했음에도 여전히 어떤 가문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서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에게 눈 앞의 욕망은 마음껏 누릴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억압된 것들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의식은 그것을 억압으로 인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정작 본인들은 ‘괜찮은데?’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 몸에서는 증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원인 불명의 증상이 당시 귀부인들 사이에서 주로 나타난 탓에, 그런 증상에 여성의 자궁을 의미하는 상징적 단어인 ‘히스테리’라는 병명이 붙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억눌린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의미심장한 가설하에 ‘억눌린 것’과 ‘다시 (몸의 증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라고 지칭했습니다. 그것들이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 주로 사회적으로 금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적 에너지에 무의식의 기원을 둔 이 리비도이론은 프로이트가 다른 정신의학자들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고수했던 대표적 이론이며 평생에 걸쳐 자신과 환자들의 임상을 거치며 수정을 반복해 발전시킨 이론입니다.

     로이트는 리비도를 두 가지 방향으로 설명했는데, 한 방향은 자기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생존을 유지하고 다른 쪽은 대상을 향해 애착을 형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그는 인간의 파괴적 본능 또한 우리가 지닌 본능적 힘이라고 고찰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살고자 하는 생동의 에너지만이 아니라 파괴하고자 하는 공격적 추동 또한 동등하게 있는데 한 개인은 사회 속에서 그 에너지들 간의 균형을 찾아 조율한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병리적 증상’이라 여기는 파괴성은 그 두 가지 본능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정신을 본능과 구조로 파악하고 평생에 걸쳐 그 특성을 규명해낸 정신분석학은 이렇게 프로이트의 전 생애의 투지로 개척되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공표했습니다. 그에게 인간은 이 두 가지 본능의 갈등 사이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심리구조적으로 모두 억압이 내재된 비정상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각각의 억압된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이지 ‘어떤 병’으로 진단받느냐 아니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임상에서도 유지하고 있는 ‘프로이트의 의자’는 바로 이런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분석가의 의자는 내담자의 앞이 아니라 뒤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치료는 분석가의 주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담자의 자기 성찰의 역량에 달려 있으며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이 그 해석의 열쇠라는 의미입니다. 무의식의 공간을 가장 정확하게 마주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에 분석가는 내담자의 담화에 개입하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고 적절히 질문하며 해석을 안내’할 뿐입니다.

    ‘마음’이 화두인 시대입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병명이 계속 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살기 편해질수록 왜 우리 안의 병명은 늘어가는 것일까요? 살기 편한 시대라는 것이 우리가 순수한 욕망을 남들 앞에서 억압해야 하는 시대임을 반증하는 것일까요? 세계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영어단어라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인 것을 프로이트는 아주 일찍부터 마음의 관찰을 통해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프로이트는 구강암의 발발과 암의 전이를 반복하며 20번이 넘는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몸으로 임종 직전에도 임상을 멈추지 않았으며 내담자를 통해 확장된 경험의 내용을 계속 기록했습니다. 그가 ‘무의식’이라는 심연의 공간을 세상에 발표한 이래 정신분석학은 기존에 도외시했던 그 공간을 바탕으로 놀랄 만한 발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한 리비도 이론은 그 기원을 성에 두고 있다는 비판 속에서도 여전히 현재 정신분석학에서 내적 원인을 소명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주요 이론 중 하나인 ‘나르시시즘’ 이론은 대상을 향해 발전해나가는 자연스러운 관심과 애착이 그 대상으로부터 거부되고 좌절되면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와서 자기에게만 집중된다는 것으로, 비단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여러 병리적 현상의 해석에서 중요하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억눌린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라는 프로이트의 조언은 즐거움을 누르면 그것과는 결이 다른 파괴적 공격성으로 되돌아 온다는 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거칠고 뾰족하고 비뚤어진 이중적 성격이 처음에 순수하게 바랐던 즐거움이 좌절된 것에서 파생되어 온 성격이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어떤 것을 억압하고 강요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1. 프로이트는 내면의 무의식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근원적 동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 프로이트는 신체의 작용에는 자신도 모르는 내면적 추동이 관여하며 그 추동은 우리가 의식에서 금지한 것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작용을 분석하고 증상을 마주하여 스스로 다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주된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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