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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롬의 사회적 인본주의에 관련된 내용을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게시물을 끝까지 읽어주시면 프롬의 사회적 인본주의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프롬의 사회적 인본주의가 궁금하다면 반드시 끝까지 읽어주세요. 이제 아래쪽에서 프롬의 사회적 인본주의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롬의 사회적 인본주의

      사회심리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자기를 위한 인간》, 《자유로부터의 도피》, 《악에 대하여》 등 수많은 저작을 관통하는 주제로 인본주의 윤리학을 다루었습니다. 프롬의 인본주의는 철저한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합니다. 집 책장에 한두 권은 꽂혀 있을 만큼 대중에게 사랑받는 프롬의 저작 내용은 전반적으로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에 대한 ‘인간다움’의 통찰입니다.

     ‘기술사회와 휴머니즘’*에서 프롬이 경계하는 사이버네틱스와 오토메이션(사이버네이션)의 사회는 현재 우리 사회 속에 부각되고 있는 현실적 문제입니다. 식당의 서빙 기계와 마트의 바코드 인식기, 패스트푸드점의 셀프주문기 등 소소한 변화는 이미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속속 없애고 있습니다. 아예 무인 마트가 잠식하는 상가들을 보면서 앞으로도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음을 예견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에 대비해 우리 사회는 실업수당, 취업교육 등 고용효율을 높일 수 있는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지만, 이는 궁극적인 대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프롬은 책에서 이런 문제점들에 대해 근로시간 단축과 기본소득제를 대안으로 주장하는데, 1970년대 초(68혁명 직후) 기술된 그의 문제의식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선 때마다 거론되는 실질적 화두라는 면에서 우리 삶에 당면한 의의를 지닌입니다.

      프롬의 글에는 늘 우리 자신의 존재적 본성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는 신념이 들어 있습니다. 프롬은 제2차 세계대전을 목도한 세대로서 전쟁 자체뿐만 아니라 그 시기의 급속한 기술 발전, 그에 따른 산업화로 확연히 달라지는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인식, 가치의 변화를 고스란히 경험하면서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처럼 인간의 의식이 자유와 민주적인 협의체제로 발전하는 것이 아님을 히틀러라는 파괴적인 독재자를 통해 확실히 실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맹목적인 ‘살육’을 별다른 고민 없이 지지하고 동참하는 독일인들의 광기를 지켜보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엄청난 충격과 회의를 경험하게 됩니다.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을 거쳐 베를린 등에서 삶을 꾸리며 독일을 자신의 나라로 믿었던 그가 나치의 살인 광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던 과정은 그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귀착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열한 고민 끝에 그는 ‘인간의 본성에 악이 있어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서 《악惡에 대하여》에서 그는 인간의 본성은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며 오히려 폭력(학대)과 파괴를 피하고 싶어하지만 그 본성이 비틀어지는 데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인들이 있으며, 사회적 요인에 의해 악한 태도를 선택한 개인들이 다시 사회에 집단을 형성해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악순환을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프롬에게 선善이란 생명이 가진 저마다의 의지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 각각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인 생명의 ‘성장’을 북돋는 것이 선이고 그것을 훼손하는 것은 악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프롬은 그의 모든 저작에서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생산적인 삶과 비생산적인 삶을 논하는데, 그의 ‘생산성’ 개념을 계속 접하다 보면 ‘고민하지 않고 그냥 기존의 삶을 이어가는 것은 비생산적인 삶인가? 단체의 질서를 위해,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욕구를 내려두고 현실에 타협하는 사람들의 삶을 매도하는 것인가? 대체 자유의지를 실천하는 생산성은 뭘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인가?’라는 반발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프롬이 그토록 강조하는 ‘생산적인 것’이란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기에 ‘옆 사람이 정해준 가치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삶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50이 넘어도 ‘누구한테 들었는데 그 사람이 그렇다더라, 어디서 봤는데 뭐가 좋다더라’로 자신을 채우는 사람의 삶에는 책임이 없습니다. 남의 주장만 따라가다가 남한테 들었다고 하면 그만일 뿐 자신은 늘 빠져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인간만의 능력인 ‘창조와 생산’이 없다는 것이 프롬의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프롬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프롬은 1974년 1월 5일 새벽 한스 위르겐 슐츠Hans-Jürgen Schultz와 함께한 두 시간여의 자전적 대담 방송 <삶이라는 이름으로>에서 외동아들로서 어머니의 노파심 속에 의존적으로 자란 자신의 성장 배경을 굴레라고 고백합니다.* 남편과 사이가 소원했던 프롬의 어머니는 외동아들인 그를 전적으로 자신의 영향하에 키웠는데, 그런 어머니의 요구에 순응하며 성장한 프롬은 1918년 프랑크푸르트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이후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겼으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해 겉돌다가 마침내 막스 베버Max Weber의 동생 알프레드 베버Alfred Weber에게 사회학을 배우면서 자신이 원하던 학문을 찾는입니다. 이 무렵 프롬은 자신의 상담가였던 11세 연상의 프리다 라이히만Frieda Reichmann과 결혼하고 정신분석학에 입문하지만 둘은 몇 해 지나 파경을 맞고 또다시 15세 연상의 카렌 호나이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가 다시 결별하게 됩니다.

     프롬은 왜 한참이나 연상인 여성들과 연거푸 관계를 맺고 파경을 맞이한 것일까? 두 여성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잔상이 느껴질 것입니다. 자기의식을 내려놓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애쓰던 과거의 패턴이 투영된 듯한 결혼은 둘 사이에 진정한 가치를 형성하지 못하고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 두 여성과의 관계에서 프롬이 정신분석학의 양분을 흡수하면서 삶을 객관적으로 직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는 것입니다. 프롬은 자신에게 익숙한 의존의 패턴을 벗고 자신이 선택한 의지에 집중하게 되면서 학자로서 명성을 알리는 계기가 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출간하고 드디어 진정한 사랑인 동갑의 반려자 헤니 구어란트Henny Gurland를 만났습니다. 이후 프롬은 왕성한 저술활동과 강연으로 전 세계적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프롬이 외치는 자유의지로부터 전개되는 생산적인 삶은 바로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창조활동입니다. 우리는 동물과 같은 본능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추위에서 몸을 보호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동물과 다른 지점은 꾸준히 발전시켜온 ‘문화’에 있습니다. 만일 기능이 인간보다 우월한 AI와 인간이 공존한다면 인간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냐고 저희는 우려합니다. 기계로 잠식된 세상에서 인간의 역할이 필요하겠느냐고 회의에 빠집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프롬은 계속해서 인간다움, 인간성에 대한 근원을 말합니다. 인간성, 그것은 우리가 본능만 가진 개별 생명이 아니라 함께하는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임을 확신하는 것이며 자신의 삶을 사랑하듯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우리가 잘하는 것을 자기 방식으로 삶 속에서 계속 융성해내는 것입니다.

    모아서 보기

    1. 프롬의 저작 내용은 전반적으로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에 대한 ‘인간다움’의 통찰입니다.
    2. 프롬이 외치는 자유의지로부터 전개되는 생산적인 삶은 바로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창조활동입니다.

     

     

    같이 읽으면 유용한 포스트

    - 앨리스의 인지심리학

    - 매슬로우의 인본주의 심리학

    - 게슈탈트 심리학

     

     

     프롬의 사회적 인본주의를 공유해보았습니다. 모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가적으로 필요하신 정보가 있다면 상단의 글들을 참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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